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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니메이터 소개글을 쓰기 어려운 이유&작화오타쿠의 교양주의
    작화 다이어리 2014. 7. 30. 14:53

    최근 작화 블로그에 애니메이터 소개글이 올라오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있었고, 그런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줬으면 좋겠는 일이다.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애니메이터를 소개한다는 것은 즉, 그 애니메이터의 기본적인 프로필에 더해 작품 이력, 그리고 스타일까지 두루 설명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작화wiki처럼 간단한 설명만을 적어 작품을 나열하는 것이라면 정말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젊은 애니메이션 팬은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쪽에서 일일이 그것들을 제시해주지 않는다면 젊은 세대는 과거의 좋은 작품, 보아야 득이 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무시할 것이며 새롭고 일시적인 것에만 눈길을 줄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작화MAD이며, 내 나름대로의 분석을 거친 애니메이터들의 작화 스타일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결책은 지극히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발견과 인식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작화MAD와 스타일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관찰자의 시점에서 분석 및 추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반드시 어떤 종류의 잘못됨, 오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착안점의 모색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지는 모르나, 잘못된 지식이 전파되는 것은 작화오타쿠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오류인 것이다.


    그렇다. 작화오타쿠라는 것은 일종의 "교양주의"에 가까운 취미이다. 보통 애니메이션 팬들이 울부짖는 교양주의라는 것은 칸트라던지, 마르크스라던지 하는 애니메이션 이외의 교양을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선긋기 놀이에 불과하나, 이것들이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유사교양주의에서 벗어나 실제의 애니메이션 지식을 연구하는 자들이 진정한 아니메 교양주의의 끝자락, 작화 오타쿠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화오타쿠는 "아는 것이 의의"이며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 연구하는 것"이다.


    내가 제일 자세하게 알고 있는 요시나리 형제에 관해서도, 계속해서 내가 모르는 정보들이 발견되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품들과 만나게 된다. 그 때마다 내 안에 있던 분석들은 파괴되고 가장 깊은 루트를 파고 들어가 마침내 새로운 결실, 지식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그 전에 내가 남겨놓았던 지식의 기록들은, 분석 자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들을 근본부터 파헤쳐 바꿔쓰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지식의 전파" 이외의 무엇도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요시나리 코우씨 그림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한다.



    요시나리 요우씨는 아니메스타일 인터뷰에서 "이십수이야기(弐十手物語)"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밝혔다. 실제로, 코에 사토미(神江里見)와 요시나리씨의 그림의 데포르메 방식은 굉장히 닮아있다. 턱이 한쪽 방향으로 기우는 얼굴 형태, 주름의 유선적인 포름 등 90년대의 요시나리 요우의 스타일을 만든 것은 틀림없는 이십수이야기의 그림이다.


    이것을 언급하면서 요시나리씨는 "데포르메된 그림이 좋다. 야스히코(요시카즈) 같은 사람들의 절제된 그림은 포인트를 잡기가 어려워서 그릴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것이 "그렇다면 이 얘기는, 요우씨는 데포르메를 거의 하지 않는 코우씨와 대조적인 스타일로 이십수이야기를 선택했고, 즉 코우씨는 야스히코씨에게 영향을 받았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코우씨와 야스히코씨의 그림은 표면적으로는 닮아있지 않지만, 코우씨가 그리는 몸은 "극단적인 입체의 표현을 배제하고, 되도록 평면적인 굴곡을 통해 2차원적인 입체감으로 실제감을 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야스히코씨도 그러한 그림 방식을 하고 있다는 것에 공통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코우씨는 극단적으로 데포르메 된 그림을 그리지 않는 걸까... 라고 생각했었으나...


    이런 내 분석을 180도 뒤집어버린 충격적인 그림을 보게 되었다.



    애니메이터들의 합동 메다로트 동인지에 실린 요시나리 코우씨의 그림이다. (이것 말고도 수 장 있는데, 모두 그림이 제각각이다!)


    나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 방식은, 요우씨가 그토록 좋아하는 "미뇰라"풍의 그림이 아닌가! 명암의 형태, 손의 포름, 얼굴의 주름이 명백한 그것이다. 나는 처음에 "아, 이 페이지만 동생이 그린 것일까"하고 생각했으나, 다른 페이지의 그림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져있었다. 카나다 요시노리풍, 마츠타케 토쿠유키풍, 사사키 마사카츠풍의 그림까지. 코우씨는 데포르메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릴 수 있으나 작화 스타일을 고정시켜온 것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발키리 프로파일의 인터뷰에서도 "2차원의 디자인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콜라주하여 몇개의 선으로 표현할지가 중요하다"라는 식의 디자인론을 펼친 바 있으니, 이것이 그가 "디자인적으로 구애받지 않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발언이었다는 것을 이 그림을 보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새로운 발견이 생기고, 그에 따른 사고 변화와 재해석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시점이 되어서야 "애니메이터를 가장 정확하게 소개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불가능하다.

    반드시 이런 리스크를 안고서 애니메이터에 대한 정보를 전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들이 글을 읽고서 자신 나름대로의 분석을 펼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독자가 너무나도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그 지식들을 받아들여버리고, 그것이 "정확한 지식"이 되고 사실이 된다.

    그 그림을 그린 본인의 인터뷰라고 해서 모든 것이 사실인 것도 아닌데,(그 순간의 착각, 편집자의 사상에 의한 편집 등이 포함되므로) 하다못해 얼굴도 본 적 없는 인간이 쓴 분석글이 사실이 되어버린다면 과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직은 "작화를 분석"한다는 것이 대중적인 취미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대강적이고 불충분한 지식들로 소개글을 쓴다고 해서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애니메이터 소개글" 보다는, 나의 작화적인 분석과 착안점에 대해서 꾸준히 글을 써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가, 자주적으로 자신의 시점에 깨닫고 차이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작화블로그도 더욱 충실한 내용을 써나가기 용이해질 것이고 작화 오타쿠의 세계도 넓어질 것이다.


    그 첫 발걸음으로 "애니메이터의 작화를 판별하는 법"에 대해서, 언젠가 자세하게 다뤄보고자 한다.

    작화를 아는 능력을 얻고 나면, 어떤 분석이 내 생각에 맞는 방법인지, 그곳에서 어떤 지식을 찾아낼 수 있는지가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애니메이터 소개글은 독자들에 의한 "비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지식이 보충되고 다양한 시점에서 그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2015.04.21 - 내용에 착오가 있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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